[아빠]
[알았다아빠도먹을께집에서기다릴께]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내내, 그 한 줄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틀린 데가 두 군데였다. '먹을게', '기다릴게'. 14년 동안 남의 보고서에 빨간 펜을 긋던 손가락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3년 동안, 그 틀린 맞춤법이 보고 싶었다.
교문을 나서자 밤공기가 찼다. 학원 승합차들이 비상등을 깜빡이며 줄지어 서 있었고, 문방구는 벌써 셔터를 내렸다. 버스는 한참 있어야 올 것 같았다.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냥 뛰었다. 비디오 가게 앞을 지나, 붕어빵 리어카를 지나, 공중전화 부스를 지나.
저 부스에서 동전을 넣고 아빠한테 전화한 적이 있었다. 비 오는 날, 우산이 없다고. 아빠는 회사에서 일찍 나와 우산 두 개를 들고 교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친구들이 볼까 봐 아빠를 못 본 척 지나쳤다.
그 장면은 이상하게 한 번도 잊히지 않았다.
서른아홉의 머리는 계속 경고를 보냈다. 무릎 나간다. 내일 종아리에 알 밴다. 필라테스 3개월 끊어 놓고 두 번 간 몸으로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런데 이 몸은 그런 사정을 몰랐다. 숨이 차오르는 게 오히려 신났다. 가방 속에서 교환일기와 정석이 덜컹거렸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3층 창문을 올려다봤다. 거실 불이 켜져 있었다.
엄마가 지난달 부동산에 내놓은 집이었다. 집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자꾸 니 방을 들여다본다고, 몇 시간 전 지하철에서 엄마가 그랬다. 22년 뒤의 지하철에서.
지금 그 방을 기웃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 내 방이니까.
◇
현관 앞에서 초인종에 손가락을 올린 채 한참을 서 있었다.
누르면 정말로 문이 열릴 것 같았다. 그게 무서웠다. 본부장 결재판을 들고 문 앞에 섰을 때도 손이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누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계단에서 쿵쿵거리는 게 너인 줄 알았다. 왜 이렇게 늦어?"
엄마였다.
고무장갑 낀 손. 꽃무늬 앞치마. 뽀글뽀글한 파마머리가 새카맸다. 나중에는 두 달에 한 번 뿌리 염색을 해야 하는 머리였다.
눈가에 주름이 없었다. 손등에 검버섯도 없었다. 계산해 보니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고작 다섯 살 남짓 위였다. 거의 동년배였다.
"엄마, 피부 진짜 좋다. 어디 다녀?"
"다니긴 어딜 다녀? 얘가 무슨 소리야."
"아니, 그냥. 관리 잘했다고."
"관리는 무슨. 너 키우느라 다 늙었다."
다 늙었다니. 그 얼굴로 그런 말 하면 환갑 넘은 엄마가 서운해할 텐데.
엄마가 고무장갑을 벗고 내 이마에 손바닥을 댔다.
"열은 없는데. 땀 좀 봐. 뛰어왔어? 밥은?"
"……엄마, 혹시 맞선 얘기 하려는 거면 오늘은 하지 마."
엄마 입이 떡 벌어졌다.
"맞선? 고2짜리가 무슨 맞선이야? 너 어디서 이상한 드라마 봤지?"
아차. 그 얘기는 한참 뒤에 나온다. '마흔하나에 공무원이고'로 시작해서.
"아니야. 들어갈게."
"마이 벗어서 걸어 놔. 구겨졌다고 내일 아침에 또 다려 달라고 하지 말고."
내 교복을 매일 밤 다려 준 사람이 엄마였다는 걸, 나는 서른이 넘어 처음 셔츠를 다리다가 알았다.
◇
신발을 벗는데 텔레비전 소리 너머로 신문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왔나."
발이 바닥에 붙어 버렸다.
아빠가 거실 바닥에 앉아 있었다. 소파를 등받이 삼아, 러닝셔츠에 무릎 나온 트레이닝 바지 차림으로. 신문을 펼친 채, 돋보기도 없이.
머리가 새카맸다. 숱도 많았다. 팔뚝이 단단했다. 텔레비전에서는 드라마 엔딩 음악이 흘러나왔다. 드라마는 안 본다면서 끝까지 틀어 놓는 것도 그대로였다.
마지막으로 본 아빠는 영정 사진 속에 있었다. 그 사진보다 스무 살 가까이 젊은 얼굴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거기 서 있어. 미친개한테 혼났나?"
아빠는 미친개를 알았다. 내가 저녁마다 밥상에서 그 사람 흉을 봤으니까.
"……아니. 이겼어."
"뭘 이겨?"
"협상."
아빠가 웃었다. 눈가에 주름이 딱 세 줄 잡혔다.
그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방이 어깨에서 미끄러졌고, 정신을 차려 보니 아빠 목에 매달려 있었다. 신문이 바스락 구겨졌다.
아빠한테서 스킨 냄새가 났다. 화장실 선반 위의 초록색 병. 장례식 날, 그 병을 차마 못 버리고 내 가방에 넣어 왔었다.
"어, 어? 왜 이래, 다 큰 게."
"아빠."
"어."
"아빠아……."
그 이상은 말이 안 나왔다. 22년 치를 한꺼번에 쏟으려니 목이 막혔다. 결국 나온 건 열여덟 살짜리 울음이었다. 콧물까지 흘리는, 아주 볼품없는.
아빠의 커다란 손이 어색하게 내 등을 두드렸다. 툭. 툭. 검지로 문자를 누르던 바로 그 박자였다.
이 손이 마지막으로 내 등을 두드려 준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그때도 나는 바쁘다며 먼저 몸을 뺐을 것이다.
부엌에서 엄마 목소리가 넘어왔다.
"얘 오늘 이상해. 아까 현관에서는 나보고 피부 좋대."
"좋긴 좋지."
"당신은 가만있어."
나는 울다가 웃었다.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
엄마가 데운 김치찌개를 식탁에 올렸다. 계란말이도 있었다. 아빠 앞에도 밥공기가 놓였다.
"아빠 아직 안 먹었어?"
"니 오면 같이 먹으려고."
"문자로는 먹는다며."
"먹는다 했지, 먼저 먹는다곤 안 했다."
엄마가 혀를 찼다.
"너네 아빠 오늘 웬일로 아홉 시 전에 들어왔어. 들어오자마자 핸드폰부터 내밀더라. 딸이 아빠도 꼭 먹으래, 하면서. 세 번이나 보여 줬어."
"두 번이다."
"세 번."
아빠는 대꾸 대신 주머니에서 폴더폰을 꺼냈다. 검지로 꾹꾹 문자함을 열더니 화면을 내 코앞에 내밀었다.
[미정이]
[응먹었어아빠도꼭먹어]
"봐라."
"……알아. 내가 보낸 거야."
"그래도 봐라."
보낸 사람한테까지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폰을 닫고 나서야, 계란말이 제일 두꺼운 조각을 집어 내 밥 위에 얹었다.
한 술 떴다. 짰다. 엄마 찌개는 늘 조금 짰다.
아빠가 떠난 뒤 엄마 찌개는 싱거워졌다. 간 봐 줄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고 했다.
마지막 설날이 생각났다. 나는 보고서 핑계로 하룻밤도 안 자고 일어섰다. 현관에서 아빠가 그랬다. 밥은 먹고 가라.
가서 먹을게, 아빠.
먹지 않았다. 그게 아빠한테 한 마지막 거짓말이었다.
"왜 또 울어. 짜나?"
"응. 짜. 맛있어."
나는 밥을 꾹꾹 씹었다. 이번엔 한 톨도 안 남길 생각이었다.
아빠 배가 러닝셔츠 위로 볼록했다. 서른아홉의 오지랖이 또 튀어나왔다.
"아빠, 건강검진 받아. 매년. 대충 말고 제대로."
"회사에서 다 한다."
"회사 거 말고. 제일 좋은 걸로 내가 끊어 줄게."
"니가 무슨 돈으로?"
"……적금 깨서."
"너 적금 있니?"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아빠는 껄껄 웃었다. 웃음소리에 텔레비전 소리가 묻혔다.
어디에든 저장해 두고 싶은 소리였다. 22년 뒤에 꺼내 들을 수 있게.
"너 오늘 진짜 뭐 잘못 먹었니?"
오늘만 두 번째 듣는 질문이었다. 아까는 크림빵이라고 했고, 이번엔 엄마 찌개라고 했다. 둘 다 진심이었다.
마흔 후반의 아빠. 지금의 나보다 몇 살 많지도 않은 사람. 이 사람도 오늘 회사에서 누군가한테 반려를 당했을까. 그러고도 딸 문자 하나에 아홉 시 전에 퇴근했을까.
"아빠, 회사 힘들지."
숟가락이 잠깐 멈췄다.
"고딩이 별걸 다 묻네. 공부나 해."
아빠는 찌개를 크게 한 숟갈 떠 넣고, 우물우물 덧붙였다.
"……오늘은 괜찮더라. 문자 받고."
어쩌면.
이번에 바꿀 수 있는 게, 은지 하나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
내 방은 그대로였다. 벽에 붙은 아이돌 브로마이드, 책상 위의 스탠드, 한쪽 눈이 떨어진 곰 인형.
2026년의 이 방은 이미 비어 있었다. 낯선 사람들이 문간에서 방 넓이를 가늠했고, 엄마는 내 물건을 상자에 담아 '취급주의'라고 적었다.
교환일기를 펼쳤다. 은지가 그린 하트 세 개 아래, 빈 장.
펜을 들자 손이 또 알아서 움직였다.
[은지 님께. 금일 공유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니지.
두 줄을 쫙쫙 긋고 다시 썼다.
[은지야. 오늘 크림빵 고마웠어.]
다음 줄에서 펜이 멈췄다. 하고 싶은 말은 22년 치인데, 열여덟 살 윤미정이 할 수 있는 말은 몇 줄 안 됐다. 80바이트보다는 넓은데, 이상하게 더 좁았다.
따르릉.
거실에서 집 전화가 울렸다. 열한 시가 넘어 있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엄마 목소리. 그리고 수화기 내려놓는 소리.
"또 끊네. 미정아! 아까 아홉 시쯤에도 이런 전화 왔었어. 숨소리 들어 보니까 남자애 같던데?"
안방 문이 벌컥 열렸다.
"뭐? 남자?"
아빠가 거실로 성큼성큼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에 또 오면 아빠 바꿔라. 어떤 놈인지 아빠가 받는다."
"당신이 받으면 걔 평생 안 걸어."
나는 방문에 기대 웃음을 참았다.
2026년에는 엄마가 맞선 상대를 구해 오는데, 2004년에는 아빠가 남자 전화를 막아선다. 그 사이 어디쯤에서 나는 타이밍을 제대로 놓친 게 분명했다.
그런데 웃음이 잦아들자 뭔가가 걸렸다.
내 폰이 미친개한테 압수됐다는 소문은 쉬는 시간 종이 치기도 전에 온 학교에 퍼졌을 것이다. '졸업 때까지'라는 말까지 붙어서. 돌려받은 건 미친개와 나밖에 모른다.
그러니까 휴대폰 대신 집으로 건 사람. 우리 집 번호를 아는 사람. 엄마가 받으니까 아무 말 없이 끊는 사람.
체육복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다니던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설마.
착각일 수도 있었다. 처음 열여덟 살을 살 때도 나는 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끝까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는 책상으로 돌아가 교환일기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내일 쉬는 시간에 자판기 가자. 7반.]
펜을 내려놓기 전에 잠깐 망설이다가, 그 밑에 작게 덧붙였다.
[이번엔 고개 안 숙일게.]
(4화 끝)
◀ 이전 화: [나의 두 번째 2004년] 3화.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의 두 번째 2004년》은 매주 수·금 낮 12시에 연재됩니다.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나의 두 번째 2004년] 5화. 캔커피 두 개 (0) | 2026.10.30 |
|---|---|
| [나의 두 번째 2004년] 3화.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0) | 2026.10.23 |
| [나의 두 번째 2004년] 2화. 열여덟, 재입사 (0) | 2026.10.21 |
| [나의 두 번째 2004년] 1화. 서른아홉, 반품 불가 (0) | 2026.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