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마자 천장부터 확인했다.
오피스텔의 하얀 천장이 아니었다. 누렇게 바랜 벽지 위에 야광 별 스티커 몇 개가 희미하게 붙어 있었다.
베개 옆의 은색 폴더폰을 열었다. 딸깍.
[2004.10.21 (목) 06:40]
하루가 넘어가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다 꿈일 줄 알았다. 반쯤은 그러길 바랐고, 반쯤은 그게 무서웠다.
이불을 걷고 일어서다가 멈칫했다. 종아리가 멀쩡했다.
어젯밤 학교에서 집까지 전력 질주를 했는데. 서른아홉이었으면 오늘 계단을 뒷걸음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열여덟 살의 다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뿐했다. 억울할 정도로.
방문 고리에는 다려진 블라우스가 걸려 있었다. 거실에 나가니 아빠가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초록색 병 스킨 냄새가 현관까지 번져 있었다.
"일찍 일어났네. 밥은 먹고 가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마지막 설날, 현관에서 들었던 바로 그 말이었다.
"응. 먹고 갈게."
나는 식탁에 앉아 진짜로 밥을 먹었다. 아빠가 보는 앞에서, 크게 한 숟갈.
엄마가 계란 프라이를 내 밥 위에 툭 얹었다.
"엄마, 블라우스 고마워. 매일 다려 줘서."
뒤집개가 허공에서 멈췄다.
"……너 어디 아프니? 고맙다는 소리를 다 하고."
"그냥. 나중에 셔츠 다려 보면 알아."
"니가 셔츠를 왜 다려?"
서른 넘어서 다리게 된다고는 차마 말 못 했다. 그것도 혼자 사는 오피스텔에서, 다리미판도 없이 수건 깔고.
구둣주걱을 내려놓던 아빠가 피식 웃었다.
"잘 먹네."
현관문이 닫히기 직전, 아빠가 고개만 다시 들이밀었다.
"어제 그 전화, 또 오면 아빠 바꿔라."
"아빠 회사 가잖아."
"……그럼 엄마가 받아라."
부엌에서 엄마가 소리쳤다.
"어제 내가 두 번 다 받았거든!"
◇
교문 앞에서 미친개가 막대를 들고 서 있었다. 아침 복장 단속이었다. 앞서 가던 애들이 일제히 치마 길이를 끌어내리고 이름표를 바로 달았다.
내 차례가 되자 막대 끝이 내 이름표를 가리켰다.
"윤미정."
"네."
"……왔다."
"네?"
미친개는 다음 학생을 노려보는 척하면서 입술만 움직였다.
"답장. '응' 한 글자."
하마터면 소리 내서 웃을 뻔했다.
"축하드립니다. 결재 나신 거예요."
"뭔 결재야. 들어가!"
막대가 내 등 뒤 허공을 휙 그었다. 하나도 안 무서웠다. 그 사람 귀가 조금 빨갰다.
교실 문을 열자마자 누가 외쳤다.
"윤 부장님 출근하셨습니다!"
박수가 터졌다. 하룻밤 사이에 직급이 굳은 모양이었다. 이러다 법인카드도 나올 기세였다.
은지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기한."
"엄수했습니다."
교환일기를 받아 든 은지가 그 자리에서 펼쳤다. 크림빵 줄에서 입꼬리가 올라갔고, 7반 줄에서 눈이 동그래졌다.
"드디어! 윤미정이 먼저 가자고 했어!"
그러다 마지막 줄에서 한쪽 눈썹만 찡그렸다.
"근데 '이번엔 고개 안 숙일게'는 뭐야?"
"……거북목 교정."
"너 거북목이야?"
"될 예정이야."
은지는 영 모르겠다는 얼굴로 일기장을 덮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너 폰 졸업 때까지 뺏겼다고 7반까지 소문났대."
"돌려받았는데."
"그건 아무도 몰라. 윤 부장 전설만 퍼졌지."
어젯밤 집 전화가 생각났다. 두 번. 아무 말 없이.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정석을 펼쳤다. 거꾸로였다.
◇
그날 수업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연습장에 기획안을 썼다.
[강현우 재회 건]
목표: 자연스러운 첫인사
진행: ① 자판기 앞에 선다 ② 음료를 고르는 척한다 ③ "어, 7반이지?"
성공 지표: 눈 마주침 1회, 대화 1문장 이상
리스크: 침 자국, 앞머리, 나이
마지막 줄에서 펜이 멈췄다. 상대는 열여덟 살이었다. 우리 팀 막내보다 열 살은 어렸다.
……괜찮은 걸까, 이거.
점심시간에는 은지 손거울을 빌려 앞머리를 열 번쯤 내렸다 올렸다. 은지가 필통에서 체리 향 립밤을 꺼내 줬다.
"발라. 윤 부장님 중요한 회의잖아."
립밤을 바르는데 은지가 턱을 괴고 나를 빤히 봤다.
"너 강현우 좋아하지?"
교환일기 속에서 은지 글씨로 읽었던 문장이었다. 처음 열여덟 살의 나는 그 질문에 끝까지 답을 안 썼다.
"……검토 중이야."
"그게 뭐야. 좋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긍정적으로 검토 중."
은지가 책상을 치며 웃었다. 노란 똑딱핀이 달랑거렸다.
그 웃음을 보다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운동장 가의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10월도 중순을 넘겼다. 겨울이 멀지 않았다.
올겨울, 나는 이 웃음을 잃는다. 내 잘못으로.
립밤 뚜껑을 꼭 닫았다. 기획안에 한 줄을 더 적어야 할 것 같았다. 리스크 칸 말고, 목표 칸에.
◇
야자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 은지가 내 팔을 낚아챘다.
2학년 복도는 가운데 계단을 사이에 두고 여자반과 남자반으로 갈려 있었다. 자판기는 남자반 쪽 끝, 7반 앞에 있었다. 계단 하나 건너는 건데 국경을 넘는 기분이었다.
자판기 앞은 7반 남자애들로 북적였다. 실내화를 공처럼 차는 애, 서로 헤드록을 거는 애. 땀 냄새와 섬유 유연제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기획안 1단계, 자판기 앞에 선다. 완료.
2단계, 음료를 고르는 척한다. 나는 버튼 줄을 위에서부터 꼼꼼히 훑었다. 신제품 검토하듯이. 은지가 옆에서 속삭였다.
"너 그거 다 읽을 거야?"
"원래 다 읽어 봐야 돼."
그때 계단 쪽에서 누가 올라왔다.
체육복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린 남자애였다.
머릿속 기획안이 하얗게 날아갔다.
강현우.
졸업앨범 사진보다 훨씬 말랐다. 키만 훌쩍 크고 어깨는 아직 덜 자란, 그 나이 남자애 특유의 길쭉한 몸. 짧게 깎은 뒷머리. 손등에 번진 볼펜 자국.
서른아홉의 눈으로 보니 솔직히 좀 애기 같았다.
그런데 심장은 열여덟 살 거였다. 귓속에서 북이 울렸다. 본부장 앞에서 PT 40장을 넘길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나는 허둥지둥 동전을 넣고 아무 버튼이나 눌렀다. 쿵. 포도 주스였다. 마시지도 않는 포도 주스.
강현우가 내 옆에 섰다. 팔 하나 거리였다. 그 애가 동전을 넣고 같은 버튼을 두 번 눌렀다.
쿵. 쿵.
캔커피 두 개.
그 애는 야자 쉬는 시간마다 캔커피를 두 개씩 샀다. 처음 열여덟 살 때 나는 그게 다 자기가 마시는 건 줄 알았다.
7반 남자애 하나가 그 애 어깨에 팔을 걸었다.
"강현우, 또 두 개냐? 카페인 중독이냐?"
"……어."
대답이 짧았다. 귀 끝이 빨갰다.
그 애가 몸을 돌렸다. 복도가 좁았다. 비켜선다고 비켜섰는데 체육복 소매가 내 팔을 스쳤다.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
쌍꺼풀 없는 눈이 조금 커졌다. 놀란 건지, 원래 그런 눈인지 알 수 없었다. 22년 동안 그 눈을 떠올릴 때마다 표정은 늘 흐릿했다. 지금은 속눈썹까지 다 보였다.
그 애 시선이 내 마이 주머니로 내려갔다. 주머니 밖으로 폰 비즈 줄이 늘어져 있었다. 졸업 때까지 뺏겼다던 그 폰.
그 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도 못 했다.
'안녕'. 14년 동안 메일 첫 줄에 수천 번 쓴 '안녕하세요'에서 '하세요'만 빼면 되는 말이었다. 그게 안 나왔다.
체육복 등이 계단 쪽으로 멀어졌다.
은지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그냥 보냈어?"
"……일정 조율 중이야."
"뭐래. 무슨 귀신 본 얼굴이야."
귀신은 아니었다. 한 번 놓친 사람이었다.
졸업식 날 그 애가 나를 찾아다녔다는 얘기는 한참 뒤에야 들었다. 나는 그날 사진 몇 장만 찍고 일찍 집에 갔다. 은지가 없는 졸업식은 오래 있고 싶은 데가 아니었다.
그렇게 한 번 놓쳤고, 방금 또 놓쳤다.
성공 지표 점검. 눈 마주침 1회, 달성. 대화 0문장, 미달. 회사였으면 '부분 달성'이라고 적고 슬쩍 다음 분기로 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열여덟 살에게는 다음 분기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
교실로 돌아와 의자를 빼다가 멈췄다.
내 책상 위에 캔커피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방금 자판기에서 떨어진 것과 같은 캔이었다. 물방울이 맺혀 책상에 동그란 자국을 내고 있었다. 쪽지는 없었다.
"이거 누가 놨어?"
앞자리 애가 MP3 이어폰을 빼고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화장실 갔다 왔더니 있던데."
보람도 고개를 저었다. 출석부 정리하느라 못 봤다고 했다.
"윤 부장님, 결재 서류 올라왔습니다!"
누가 외치자 교실이 또 와르르 웃었다. 은지는 입을 틀어막고 내 팔을 마구 때렸다.
나는 이 장면을 알았다.
22년 전에도 이 캔커피는 내 책상 위에 있었다. 그때 나는 누가 놓고 갔는지 묻지 않았다. 그 애가 아니면 창피하니까. 착각이면 아프니까. 끝내 따지 못한 캔은 필통 옆에서 미지근해졌고, 나는 그걸 그대로 가방에 넣어 집에 가져갔다.
서른아홉 살까지 살면서 알게 된 게 하나 있다.
착각일까 봐 묻지 않는 사이에, 사람은 졸업을 하고, 전학을 가고, 영영 떠나기도 한다.
아빠는 3년 전에 떠났다. 은지는 단톡방에 없다. 강현우는 졸업앨범 속 증명사진으로만 남았다.
그리고 나는 22년 동안, 묻지 않은 질문들을 서랍에 넣고 살았다. 미친개 서랍처럼 꽉 찰 때까지.
캔커피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이 얼얼하게 차가웠다.
"미정아, 어디 가?"
"현장 확인."
교실 뒷문을 열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쉬는 시간 끝나는 종이 울리기 직전이었다. 실내화가 복도 바닥에서 미끄러졌다.
등 뒤에서 은지가 외쳤다. "윤 부장 출동한다!" 반 애들이 우르르 뒷문으로 몰려나왔다.
어젯밤 그렇게 뛰고도 멀쩡했던 다리가, 오늘도 가뿐했다.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계단참에서 체육복 등 하나가 막 아래층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강현우!"
복도에 있던 애들이 일제히 돌아봤다.
체육복 등이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그 애가 돌아섰다.
(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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